교환실 일기

교환원생활을 시작한지 세달이 좀 넘어가는데 이제 슬슬 귀가 아픈 현상도 사라지고 자주 묻는 전화번호는 머리속에 캐시되기 시작하면서 적응모드로 들어가고 있다. 옆자리에 근무하는 공무원 아줌마는 이 일만 20년째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이걸 어찌 몇년씩 버텨낼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돈만 많이 준다면 이 일도 해볼만 하다고 느끼고 있다; 하루에 두시간씩 쉬는시간이 있고 전화받으면서 웹서핑정도는 가능하니 스트레스 해소에 좋은 키보드 워리어를 부업으로 하면 좋을 듯 싶다.

전화번호 시트

이런걸 펼쳐놓고 번호를 찾아준다. 원시적인 검색 방법 =_=

안녕하세요 안산시청입니다

교환기에 뜨는 번호에 따라 저 안산시청은 단원구청이나 상록구청으로 변경되기도 한다. 하루에도 수백번씩 말하는 문장이지만 아직도 입에 붙지 않아 어버버거리는 문장.. 저거 의외로 발음하기 힘들다. '담당자 연결시켜 드리겠습니다' 같은 것도 꽤 힘든데 '담당 연결해드릴께요' 정도로 고치면 꽤 발음하기 수월해진다.

어떤업무세요?

시청에 전화해서 다짜고짜 '산업교통과 바꿔줘요!' 하는 사람이 꽤 많은데 시청에는 그런 이름의 부서가 있지도 않을 뿐더러 비슷한 일을 하는 과에도 업무별로 부서가 나눠져있기 때문에 전화를 대충 돌려버리면 두세번은 더 바꿔줘야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럴때는 '주정차 과태료 납부요', '내차 끌어간놈 바꿔줘요' 하고 말하면 단번에 목적지로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산업교통과를 주장하는 경우에는 무한히 연결되지 않는 네트워크인 '대표전화'로 전화를 넘겨줄 수 밖에 없다 (대부분 공무원들은 자기 업무 말고는 어디로 바꿔줘야 되는지 잘 모름)

야이 ㅅㅂㄹㅁ!

의외로 욕지거리를 한다거나 불쾌한 말을 하는 민원인은 많지 않다. 하루에 한 두건 정도? 주로 주차위반 단속으로 항의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차피 나한테 항의해봤자 소용없기 때문에 일단 몇분이든 계속 들어주다가 적당히 말을 끊고 '아 그렇군요.. 담당자 바꿔드릴까요?' 하면 저쪽에선 담당자에게 다시 앵콜공연을 해야된다는 부담으로 당황하게 마련이다. (여기서 '됐어!' 하면서 포기하는 사람 50%) 일상의 작은 희열이랄까 (-_-)

말을 잘라먹다

마봉춘 100분토론을 열심히 보는 크리진씨는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 끊어먹으면 안된다고 배웠다. 그래서 민원인이 말할때는 문장이 종결될때까지 말없이 듣고있게 되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이게 불편한가보다.

민원인 : 저기 보육교사..
CRIZIN : ...
민원인 : 승급 교육을..
CRIZIN : ...
민원인 : 여보세요?;
CRIZIN : 옙! 말씀하세요!

뭐 이런상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민원인 : 저기 보육교ㅅ..
CRIZIN : 보육 담당자 연결할까요?

이런식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세심한 auto suggestion이 필요하다

여기는 안산시

민원인 : 주민세 내려구요..
CRIZIN : 계시는 곳이 어느 동이세요? (요건 해당 구청으로 돌려줘야 한다)
민원인 : 정왕동이요~ (정왕동은 시흥시)
CRIZIN : (니네 동네로 가!)

거기 어떻게 찾아가요?

가장 받기 싫은 전화 1위. 국가공인급 길치에게 이런걸 물어봤자 '큰길 나와서 이정표 따라가세요' 이상의 답변은 얻기 힘들거늘.. 가끔씩 '금천구에서 상록구청 어케 찾아가요?' 하는 별 다섯개짜리 난이도의 질문이 들어오면 시청에 차량 운전하는 기사님들 사무실로 돌려버리면 된다.

전화를 안받네요..

수도요금 담당이나 차량등록사업소 일부 부서는 전화 더럽게 안받기로 유명하다. 민원인이 저런 곳을 찾아서 전화를 연결했지만 받지 않는 경우는 약 20초쯤 신호가 울린 뒤 다시 나한테 돌아오게 된다. '어머~ 담당자분이 자리에 안계신가보네요~' 하고 다시 전화를 돌려주는데 담당자가 배째고 있는 경우는 이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게 된다. 민원인의 전화요금은 계속 증가되며 내쪽으로 전화가 돌아올때마다 민원인의 억양은 1/2 옥타브씩 높아지게된다;

어찌됐건, 이제 대략 열흘정도만 출근하면 말년휴가 후 소집해제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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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원 전직

관공서에서는 일년에도 몇번씩 크고작은 인사이동을 한다. 옆에서 보기에는 몇년 근무하다 좀 익숙해졌다 싶으면 딴데로 가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와서 처음부터 다시 업무를 익히는 삽질이 굉장히 한심해보이기는 하는데 효율보다는 부패방지(?)가 우선이라고 하니 일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아무튼 몇주전에 인사이동이 시행되면서 통신 민원 담당이라는 팀이 하나 더 생기고 전체 인원이 한명 줄어드는 일이 있었는데 일이 매끄럽지 못하게 처리되면서 결국 내 생계가 위협받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다른곳으로 가버려 공석이된 직원의 담당은 서무. 없으면 안되는 자리라 다른계에서 사람을 한명 데려와야 하는데 모든 계장들이 '우리계에서는 더이상 빼줄 인력이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협의는 무산되고 과장이 교환업무 보는 직원중 한명을 서무로 이동하도록 명령했으나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삼!' 하고 거부하는 관계로 과장은 살짝 혈압이 올라 이 직원을 다른데로 보내버리고 다른과에 있던 직원을 영입해 서무를 시키고 있다. 아무튼 교환 담당 직원이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면서 교환 직원들이 반발을 했고 이 자리를 메꾸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공익을 투입하게 됐는데 그게 바로 내가 됐다-_-;

이 곳에서는 시청과 두 구청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모두 받아 담당하는 부서로 전화를 연결해주는 일을 한다. 민원인에게 업무내용을 물어보고 해당 부서를 결정하는 과정이 그야말로 case by case라 나같이 땜빵으로 투입된 인력이 처리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여권은 2084, 통신판매 허가는 2827, 주차단속 항의는 단원구는 6284 상록구는 5293 하는 식으로 인덱스를 만들고 A4 용지 몇장에 이쁘게 프린트해 눈으로 검색을 한다. 검색에 실패하면 왠지 이곳이다 싶은 부서로 대충 돌려주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민원인들 수명을 단축시키는데 특효로 알려진 공무원 무한 전화돌리기 스킬로 이어지게 된다; 반면에 여기서 몇년씩 일한 베테랑 직원들은 머리속에 다년간 최적화 과정을 거친 검색엔진이 들어있어서 쿼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키패드를 누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옆에서 보고있으면 그저 신비로울 따름..;

그동안은 좀 편한자리에 있어서 근무시간에 딴짓하기도 수월했는데 이곳에서는 뭔가에 집중하기가 불가능해서 낭패다. 새 직원 충원 계획이 있었지만 며칠전 물건너갔다는 얘기가 들리는걸로 봐서 아마 새 공익이 들어오거나 일용직을 선발하기 전까지는 이런 상태가 계속될 것 같다. 재수없으면 소집해제일까지 이짓을 하게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게 아니라는 점에서 덜덜덜..

교환기

이제 그만 나를 놔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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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일기

우리 계장님은 상당히 잡학다식 하신 편이다. 문제는 남들이 이걸 알아주었으면 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잡담중에 삐끗하면 일장 강의를 들어야 하는 사태가 온다는 것이다.

오늘의 희생양은 A 주사님. 무슨 주제의 대화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나?' 라는 물음에 적절한 답을 하지 못한 죄로 태초의 우주로부터 출발해 빅뱅이론을 거쳐 카오스, 블랙홀에 이르는 우주여행을 해야만 했다. 이분도 꽤 고집있으신 분이라 '사실 모든 물질은 팽창하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럼 내 책상이 점점 커진다는 말입니까!' 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바람에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이 흘러가버리고 지나가던 다른계 계장님까지 가세하여 코페르니쿠스, 유비쿼터스 등등의 화두가 오가는데, 흡사 네이버 뉴스 덧글창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킬 정도였다;;

아무튼, A 주사님을 넉다운 시키고 기분이 좋아진 두 계장님. 연이은 잡담중에 시청 계약직 웹디자이너의 모니터가 사무실에서 유일한 CRT임을 발견하고 얘기를 나눈다. 그러던중 모니터가 어둡다는 불평을 듣자,

'아니 그럴수가! 이보시오 A 계장! 어서 이분의 모니터를 열라 좋은걸로 바꿔주시오!'

'콜! 서무는 당장 견적뽑고 예산을 편성하시오!'

라는 분위기로 접어들어,

'흠, 내가 디카로 찍은 사진을 열라 좋은 모니터로 보니까 화이트 노이즈가 싹 없어지더라고! 디자인하려면 그런게 있어야지, 한 29인치 PDP면 돼? 그거 한 400이면 사나?'

주) 화이트 노이즈 : 음향기기 등에서 무음 상태일때 치- 하고 들리는 잡음

'아니요.. 저는 21인치 고급형 CRT면 되는데..'

'그거는 화소수가 적어서 안돼 한 30인치는 돼야지'

참고로 이분의 주 업무는 320x100 정도의 배너 디자인

때마침 전산용품 취급하시는분이 등장했고 대략 이런 분위기면 코끼리도 사달라면 사주겠다 싶어서 옆에서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EIZO 19인치 블랙 CRT 한번 써보는게 소원이라 '에이조 에이조' 하고 거들었더니 에이조는 명성에 비해 이렇고 저런게 안좋으니 애플비전(오랫만에 들어본다..;;)같은게 차라리 낫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하여 지금은 '쵝오 좋은걸로!' 라는 요건으로 견적 요청이 들어가 있는 상태. 사무실 한구석에서 잠자고 있는 맥킨토시에도 관심을 보여놨으니 분위기로 봐서는 당장 파워맥에 시네마 디스플레이라도 질러버릴 상황이다.

이 곳은 너무 재밌다;;

2006.03.17 덧 - 결국 시네마 디스플레이 23인치에 쿼드로가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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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령집 정리놀이

이른바 주무계 공익 업무의 꽃이라 불리는 (누가 그래..) 법령집 정리.


캐비닛 한쪽에 대한민국 현행 법령집이라고 불리는 50권짜리 책이 있는데 이 책의 특징은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줘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저작권법이 개정된다거나 해서 법이 바뀌게 되면 바뀐 페이지만 따로 모아서 박스에 담아 배달해준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1회차에 3만원정도 하는 모양이다. 10~15cm정도 되는 추록본을 수동 업데이트 하려면 숙련된 공익 둘이 달라붙어 대략 두시간 가까이 걸린다. 규정에 따르면 새 추록본이 배달될때마다 즉시 업데이트 해야 하지만 캐비닛에 쌓아놓고 돌보지 않은 추록본이 족히 열댓권은 된다 (..) 게다가 몇몇은 분실돼버려서 이제 열심히 편집해봤자 책의 내용이 항상 최신의 내용이라는 보장도 없다. (스타크래프트 1.0에 중간버전 생략하고 1.2 패치를 하는 꼴이랄까;;)

일년에 몇번이나 꺼내볼까 의심스러운 책이라 시청 행정자료실에 한질만 갖다놔도 되지 않겠나 싶지만 (아마도) 각 과별로 한질씩 비치돼어 있는 모양이다. 빈번한 업데이트로 공익들을 괴롭히고 있는 이 녀석은 얼마전부터는 전권이 수록돼 있는 CD를 함께 제공한다. 물론 검색, 출력도 되고 한자버전, 한글버전도 동시에 존재한다. 인터넷 업데이트가 안돼서 법이 바뀌면 새 CD가 배달되기를 기다려야 되는 단점이 있지만 책보다야 백배 낫다. 한마디로 더이상 책을 뒤적일 일은 없다는 것인데 가끔씩 감사가 나와 법령집 업데이트 잘 돼있나 검사도 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노가다를 해주는 수밖에 없다.

전문을 휘리릭 보는건 CD에서 순서대로 찾아보면 되고 일부분 검색은 법제처 사이트 가서 검색해보면 최신 내용으로 검색되는데 뭐하러 이런 삽질을.. 아마 CD나 인터넷 보다는 책이 편한 사람도 있을테고 책장 한쪽을 장식하는 용도도 있겠지만 요즘같은 시대에 책 내용을 일일히 끼워넣고 빼고 하는건 아무래도 오바다.

그간 미뤄왔던 법령집 정리를 시작해야할 때가 오니 심기가 살짝 귀찮아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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